필리핀 《북부 루손주 걷는 시간》 19화/20화

《북부 루손주 걷는 시간》 19화: "6월 25일, 산타 마리아에서 비간으로 가는 길"
6월 25일, 산타 마리아를 떠났다. 아침의 상쾌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차가운 아침 공기보다는 뜨거운 햇살을 더 기대한 내가 너무 한심해졌다. 태양은 이미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보니, "오늘은 적어도 7시간을 걷겠구나..." 라는 깨달음이 스쳤다.
**"비간, 이리 와!"**라고 외치며, 나는 걷기 시작했다.
그 길은 어느새 작은 마을과 논밭을 지나, 산과 들을 넘어, 자잘한 도로를 따라 이어졌다. 드디어 내가 만날 그곳은 바로 비간. 어디선가 들려오는 칼레사의 말 소리, 그 소리가 내가 꿈꾸던 시간이었다.
그럼 이제, 내가 만난 '중간'을 소개할 차례.
1. 시작은 소박하지만 길은 멀다
산타 마리아에서 떠날 때는 한참 동안 자유로운 마음으로 걷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길은 멀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처음에는 "이 길은 내 길이야!"라며 걸어갔지만, 몇 시간이 지나면서부터는 "이게 맞는 길인가?"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지도는 언제나 한 발 늦게 답을 줬다.
걷다 보니 짜증이 나기 시작했지만, 그때 나타난 건 바로 sari-sari store. 나는 마치 운명처럼 그 가게로 들어갔다. 가게 안에서 보니, 할머니가 노인네들과 담배를 나누고 있었다. 눈을 마주쳤다. 할머니는 말했다.
"어디 가는 거야? 이 시간에 걸어가려면 힘들겠네."
나도 모르게 답했다.
"비간까지요."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 마디 했다.
"잘 가라, 네가 가야 할 길을 가는 거지."
이 한 마디에 나는 웃으며 앞으로 또 가야 할 길을 다짐했다.
2. 중간에서 만난 칼레사, 그리고 비간의 그림자
잠시 후, 나는 칼레사 한 대를 만났다. 운전자는 비간의 칼레사 노선을 드라이브하고 있던 중이었다. 아마도 그가 말한 **"비간까지 조금만 더 가면 된다"**는 말에 나는 더 열심히 걷기로 결심했다.
"내가 비간을 못 볼 리가 없잖아."
칼레사 기사는 그저 웃으며 "그렇지"라고 대답했다.
내가 칼레사를 지나쳤을 때, 비간의 아련한 풍경이 잠깐 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그건 마치 몇 년 전 내가 처음 비간을 본 날의 느낌처럼, 그냥 뿌연 아침과 석양의 조화 같았다. 그때의 그림자처럼, 비간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3. 사라져 가는 시골 길, 그러나 비간은 더 가까워지고 있다
어느새 길은 좀 더 험하고 먼 길로 변했다. 그러나 걷는 발걸음은 어느새 느리지만 빠른 걸음으로 바뀌었다. 무엇인가 다가온다, 그런 느낌이었다. 길은 점점 더 좁아졌지만, 그 안에서 나는 비간으로 가는 여정의 끝자락을 느끼고 있었다.
그 순간, 길모퉁이에서 푸른 논밭을 바라보며 한 번 더 생각했다.
"비간까지 가는 길에 나만의 이야기가 더 많아지겠구나."
《북부 루손주 걷는 시간》 제20화
“비간에서 예수님과 7박 8일”
Day 1 – 예수님과 엠파나다
산타마리아에서 비간으로 향하는 미니버스 안.
옆자리에 한 남자가 앉아 계셨다.
흰 셔츠에 샌들, 손에는 나무 십자가가 쥐어져 있었다.
"처음 비간 가요?"
"네. 처음이에요. 그런데… 낯이 좀 익으신데요?"
그분은 웃으며 대답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죠. 그냥… 예수라고 부르세요."
그날 오후, 크리솔로고 거리를 걷다가 엠파나다 노점 앞에 섰다.
"주님도 하나 드실래요?"
"그럼, 나는 아주 맵게 부탁할게."
그 순간 나는 확신했다. 이분 진짜 예수님이시구나.
Day 2 – 성당에서 예수님과
비간 대성당.
예수님은 자리에 앉자마자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나는 그 옆에 앉아 기도하는 척 하다, 슬쩍 물었다.
“예수님, 여기 오랜만이세요?”
“응, 한 2000년 만인가?”
“…그렇게 오래요?”
“나도 그사이 좀 바빴거든. 하지만 여긴 여전히 아름답구나.”
미사가 끝난 뒤, 아이 하나가 예수님을 보며 물었다.
“Kuya, are you a priest?”
예수님은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너의 친구란다.”
Day 3 – 종탑 위에서 주님과 바람 맞기
Bantay 종탑을 올라가는 길,
나보다 앞서 계단을 오르시는 예수님.
샌들 신고도 나보다 훨씬 빠르셨다.
꼭대기에 도착하자, 예수님이 말하셨다.
“이 바람… 마치 아버지의 숨결 같지 않니?”
나는 감탄하며 말했다.
“와… 주님, 여기서 사셨으면 좋겠어요.”
그분은 창밖을 보며 말했다.
“나는 너희 마음에 살고 있단다.”
잠시 침묵.
그러다 내가 중얼거렸다.
“…근데 주님, 종 한번 쳐도 돼요?”
“세게 쳐. 근심도 함께 날려보내게.”
Day 4 – 박물관, 그리고 과거의 기억
박물관 투어 중,
19세기 필리핀 화가의 작품 앞에서
예수님이 갑자기 멈춰섰다.
“이 화가, 나랑 비슷한 시기에 기도 많이 했지.”
나는 놀라 물었다.
“주님, 얘 진짜로 알았어요?”
“너희가 모르는 이름들 중에도, 나를 사랑한 이들이 많단다.”
그날 오후, 갑자기 내 얼굴이 전통의상 체험 모델로 뽑혔다.
예수님은 박수치며 말했다.
“오, 왕자님 같네. 근데… 너, 원래 옷도 좀 자주 갈아입어라.”
“…패션 지적까지?”
“아니, 마음의 옷 말이야.”
Day 5 – 숨겨진 정원과 마음의 씨앗
Hidden Garden.
예수님은 정원의 가장 구석에 앉아 있었다.
나는 옆에 앉으며 물었다.
“주님, 왜 여길 좋아하세요?”
“여긴 사람들이 조용히 걷는 곳이거든.
기도는 말보다, 침묵 속에서 자랄 때가 많단다.”
그 정원에서,
예수님은 한 아이가 버린 씨앗을 주워 손에 쥐셨다.
“이 작은 씨앗도 자라면 꽃이 되지.
네 마음도, 지금은 씨앗이지만 곧 향기가 날 거야.”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 자리에서 눈을 감았다.
기도는, 주님 손 안에서 자라나는 거였다.
Day 6 – 마차와 사건, 그리고 유튜브 스타 예수님
Calle Crisologo.
마차에서 관광객이 떨어졌고, 그 옆에서 닭이 ‘꼬꼬댁!’
예수님은 빵 터지셨다.
“하하하! 나 이런 거 너무 좋아해.”
“예수님, 이런 게 웃겨요?”
“천국에서도 이런 소동 자주 있어. 하지만, 웃음이야말로 나와 가장 가까운 기도니까.”
그 순간, 유튜버가 다가왔다.
“Sir, can I interview you? You look holy.”
예수님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하셨다.
“I’m just a traveler. Like you.”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 진짜다.
Day 7 – 마지막 밤, 그리고 고백
마지막 날 밤.
크리솔로고 거리의 돌길을 예수님과 함께 걸었다.
가로등 아래, 마차 지나가는 소리.
나는 조용히 물었다.
“예수님, 왜 저랑 함께 여행하신 거예요?”
“네가 나를 찾았잖니.”
“…근데 저, 기도도 못하고, 의심도 많고…”
“그래서 함께 온 거야. 너 혼자서는 길을 잃을까 봐.”
그날 밤, 게스트하우스에서 나는 작은 십자가를 목에 걸었다.
예수님은 내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이건 기념품이 아니야. 약속이란다.”
Day 8 – 비간을 떠나며
버스에 올라타니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웃고 계셨다.
“앞으로 어디 가세요?”
“내일은 또 누군가의 옆자리에 앉겠지.”
나는 창밖을 보며 속삭였다.
“다음에 또 같이 여행해요.”
그분은 미소 지으며 대답하셨다.
“나는 언제나 네 곁에 있어. 단지, 네가 날 기억하면 되는 거야.”
그리고 버스는 출발했다.
비간의 풍경이 멀어졌지만,
내 안에 새겨진 예수님의 얼굴과 말씀은 더 선명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