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ㅋㅋ 제롬, 이름이 딱이죠?
바나나큐 들고 하늘 보면서 "Kuya, bakit ako?" 하는 순간, 이미 소년 사도입니다.
필리핀 아이들이 가진 작지만 깊은 진심이,
종종 가장 성경적인 장면을 만들어냅니다.
예수님 시대도 그랬어요. 제자들도 평범한 어부였고, 세리였고, 어린아이를 품에 안으셨죠.
그러니까 지금 제롬이
기름에 튀긴 바나나큐를 팔며 어른들에게 미소 짓는 그 모습이
어쩌면 마태 27장 끝자락에서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다”**를 외친 백부장의 눈과 겹치는지도 모릅니다.
필리핀은 보이는 만큼 가난하고,
보이지 않는 만큼 은혜로운 곳이에요.
《필리핀 어느 가게 아이를 통해 전하는 마태복음 27장》
작은 사리사리 스토어, 혹은 Jollibee 근처의 바나나큐 노점.
한 아이가 있습니다. 이름은 제롬.
12살, 학교를 다니지 않습니다. 하루 종일 바나나큐를 튀기고, 손님에게 웃어줍니다.
웃음은 밝지만, 손끝은 기름으로 타 있습니다.
어느 날, 조용히 그 아이를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아이가 십자가를 지고 있구나.”
마태복음 27장.
예수님은 아무 죄도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조롱을 받고, 매를 맞고, 침 뱉음을 당하고, 결국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 있는 자들을 대신해 침묵으로 걸어가셨습니다.
누가 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바로 그 침묵 안에서 세상을 뒤집는 구원을 준비하셨습니다.
믿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때론 **“이해받지 못한 채, 억울한 길”**을 걷습니다.
비난을 피하지 못하고, 억울함을 설명할 기회조차 없을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예수께서 먼저 걸으신 길입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는, 반드시 부활이 있습니다.
다시 제롬을 봅니다.
그 아이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듯 보이지만,
사실 세상을 위해 기름에 튀겨낸 웃음을 건네는 사도입니다.
그의 삶은 작지만, 크신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습니다.
믿는 자들이여,
세상이 조롱할 때, 억울함이 심장을 태울 때,
예수께서 걸으신 침묵의 길, 그 고요한 순종의 길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지금 지는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다리입니다.
《필리핀에서 우산 장사 해보니》
– 하루 날씨가 계절을 다 보여주는 나라에서의 장사 철학
필리핀에선 하루에 여름이 오고, 가을처럼 흐리고, 장마처럼 쏟아지다, 다시 여름이 온다.
그러다 갑자기 천둥이 울고, 쨍쨍한 해가 동시에 떠있다.
하늘이 도통 감정 조절을 못하는 나라.
나는 그 나라에서 우산을 팔았다.
장사는 기도와 같다.
비가 올까 말까, 구름이 끼었을까 아닌가,
우산을 펼까 말까, 그 눈치 싸움이 곧 생존이다.
오늘 들고 나온 우산 다섯 개가 팔릴지,
아니면 다시 들고 집에 갈지.
장사는 늘 기도의 언어로 시작되고 끝난다.
“주여, 비를 허락하소서.”
“그러나 그 비로 사람들 다치지 않게 하소서.”
“그리고 적어도 제 우산 하나쯤은 누군가 사게 하소서.”
그렇게 비는 온다.
갑자기.
그리고 사람들이 뛴다.
어디선가 우산이 열린다.
어떤 이는 웃으며 산다. 어떤 이는 지나간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파는 건 우산이 아니라, 그 순간의 피난처였다.
필리핀에서의 장사는 변덕에 적응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었다.
늘 오는 것 같지만 늘 다르게 오는 비처럼, 인생도 예측 불가였다.
하지만 그런 날씨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더 빨리 웃고, 더 많이 용서하고,
더 깊이 믿는다.
그래서 나는,
비 오는 필리핀 거리에서 우산을 들고 서 있으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렸다.
“하늘을 보면 때를 알면서, 왜 지금은 분별하지 못하느냐.” (누가복음 12:56)
오늘의 하늘은,
한 가지 계절만 말하고 있지 않다.
우리의 하루도 마찬가지다.
기쁨, 분노, 감사, 슬픔, 그리고 믿음.
다 담겨 있다.
나는 지금도 믿는다.
하늘이 흐릴 때, 장사는 시작된다.
그리고 그 흐림은, 축복의 서문일 수도 있다.
《정전 중 이웃집에서 들리는 기타 소리》
– 조용한 듯 깊은 사람 냄새
불이 꺼졌다.
온 동네가 동시에 침묵했다.
선풍기도 멈추고, 냉장고도 멈췄다.
필리핀에서는 정전이 뉴스거리가 아니다. 그냥… “아, 또구나.”
그날도 정전이었다.
하지만 전기보다 먼저 켜진 것이 있었다.
이웃집에서 들리는 기타 소리.
탁, 탁, 탁.
서툴지만 정직한 리듬.
코드 몇 개가 반복되고,
때론 한 음을 찾느라 길게 멈춘다.
기타를 치는 건, 20대 초반의 청년.
이름은 모른다.
단지 얼굴은 안다.
가끔 웃으며 "Good evening, Kuya"라고 인사하던 아이.
그 아이가 지금, 어둠 속에서 기타로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전기가 멈췄을 때, 사람은 진짜 소리를 낸다.
TV도 꺼지고, 핸드폰도 방전 직전일 때,
남는 건 숨소리, 웃음소리, 그리고 누군가의 기타 소리다.
그날 밤, 나는 불빛 없이 앉아 기타 소리를 들었다.
마치 어둠 속에 새겨지는 기도문 같았다.
고백이었고, 질문이었고,
“괜찮냐”고 말없이 묻는 인사였다.
그 소리에 담긴 건 기술이 아니라 정이었다.
빛도 없고, 바람도 없는 그 공간에서
기타는 우리가 여전히 ‘함께 있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필리핀은 이런 나라다.
불이 꺼지면,
사람이 켜진다.
《천막 교회에서 들은 찬송가 – 천장이 없어 더 높이 올라가는 소리》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바람은 더웠지만,
그늘은 어딘가 말씀을 기다리는 냄새가 났다.
작은 길을 지나 마을 끝에 있는 천막 교회에 도착했을 때,
이미 찬송이 시작되고 있었다.
기와도 없고, 벽도 없고,
의자는 플라스틱, 강단은 나무판자.
그런데도 그 자리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천장 아래 있었다.
“Open the eyes of my heart, Lord...”
작은 스피커, 삐걱대는 마이크,
그리고 사람들.
아이들은 옆에서 장난치다가도,
그 구절에서만큼은 멈추고 따라 불렀다.
하늘이 막혀 있지 않다는 걸, 그때 알았다.
콘크리트 지붕도, 냉방도, 스테인드글라스도 없지만
그 소리는 막힘없이 위로 올라갔다.
천장이 없어서, 찬양은 더 높이 날아갔다.
어떤 여인은 눈을 감고 두 손을 들었고,
어떤 아이는 박자를 놓쳤지만 계속 노래했다.
한 청년은 눈물을 닦았다.
그 눈물은, 찬송보다 더 또렷한 고백이었다.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예배란 장소가 아니라 자세이며, 건축이 아니라 갈망이다.
우리는 벽 안에 들어와야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벽이 없을수록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법도 있다는 것을.
천막 교회에서 부른 찬송은
소리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삶으로 이어졌고,
그날 예배를 드린 사람들의 발걸음은
이전보다 조금 더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해 질 무렵, 삼겹살 굽는 소리 옆에서 시작된 큐티 모임》
– 냄새는 삼겹살이었고, 내용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필리핀의 해는 빨리 진다.
5시 반만 되어도 어둠이 준비된다.
그날도 해는 물러가고 있었고,
나는 동네 아이들이 몰려 있는 골목 끝에서 고소한 연기를 발견했다.
"Kuya, kain tayo!"
삼겹살 굽는 냄새는 국경을 넘고,
배고픔을 자극하는 데 국적을 묻지 않는다.
철판 위에서 지글지글 소리 내는 고기는
말 없이도 **"주님 감사합니다"**를 부르고 있었다.
그렇게 모인 아이들,
한 조각씩 고기를 먹으며,
누군가가 꺼낸 한 장의 성경책.
"Kuya, pwede ba tayo mag-QT habang kumakain?"
(형, 먹으면서 큐티해도 돼요?)
놀랍지 않았다.
필리핀 아이들은 신앙과 일상을 나누지 않는다.
그들은 밥 먹으며 기도하고,
노래하다가도 성경책을 꺼낸다.
그날 큐티 본문은 마태복음 6장.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한 아이가 말했다.
"형, 우리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는 거죠?
먼저 하나님 이야기 하고,
그다음 고기 먹는 거니까."
말이 끝나자
삼겹살 한 조각이 다시 입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 말씀과 고기가 함께 씹히는 맛을 알았다.
은혜는 기름기와 같이 올 수도 있다는 걸.
해는 졌고,
철판은 식었지만
그 자리엔 뭔가 더 남아 있었다.
말씀이 남았고, 마음이 남았고,
그날을 기억하는 냄새가 남았다.
《한 사람만 온 예배 – 그래도 하나님은 빠지지 않으셨다》
– 출석은 1명이었지만, 임재는 삼위일체로 가득했다
주일 오전 10시,
예배 시작 10분 전.
의자는 12개.
앰프는 중고.
선풍기는 소음이 크고,
찬양 인도자는 기다리는 중이었다.
10시가 됐다.
성경 말씀을 준비한 목회자,
찬양을 위한 기타,
모두 자리에 있었지만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아이 하나.
반바지에 슬리퍼,
성경책은 구겨진 공책 안에 찔려 있었다.
“Kuya, ako lang po ba?”
(형, 나 혼자예요?)
그 순간,
‘그럼 오늘은 취소할까?’ 라는 말이 떠올랐다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하던 주님의 발걸음이 떠올랐다.
그 길에 군중은 없었다.
제자도 떠났고,
남은 건 예수님 한 분.
그래도 그 길은 구원을 이뤘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를 시작했다.
찬양은 작았지만,
가사 하나하나가 천천히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말씀은 짧았지만,
그 아이의 눈동자는 크고 맑았다.
“하나님은 숫자로 예배하지 않으신다.”
그 말이 끝나자,
아이의 입에서 작은 아멘이 흘렀다.
그날 예배는
12개 의자 중 11개가 비어 있었지만,
하나님의 자리는 분명히 차 있었다.
주님은 출석체크를 사람 수가 아니라 마음으로 하신다.
그리고 나는 믿는다.
그날 그 예배가 하늘의 시선엔 ‘만석’이었다는 것을.
나는 지극히 낮은곳에서 너와 함께 하니 쓰러져라 그래도 나는 너을 놓지 않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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