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Series)/북부 루손주 걷는 시간

《북부 루손주 걷는 시간》 17화/18화

philippines7641 2025. 4. 29.

 


《북부 루손주 걷는 시간》 제17화

6월 20일, 뱅드에서 산타 마리아로

아침, 뱅드.
한껏 눅진한 이른 햇살이 산등성이를 감쌌다.
나는 배낭을 메고 숙소 주인 아주머니께 깊게 허리를 숙였다.
"살아있으면 또 오겠습니다!"
아주머니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나는 뒤돌아 터미널로 향했다.

길가에 늘어선 나무들, 은은한 국수 냄새가 풍기던 작은 포장마차, 그리고 이상하게 정든 골목들.
내 발걸음은 터미널로 가는데, 마음 한쪽은 뱅드에 꽂혀 있었다.
(아, 인간 마음은 이렇게 양다리를 걸친다니까.)

터미널에 도착하니 버스가 이미 대기 중.
기사 아저씨는 손짓으로 "얼른 타라"고 하고 있었다.
차에 올라타면서 마지막으로 뱅드를 돌아봤다.
"짧았다, 뜨거웠다, 안녕이다."

버스가 덜컹거리며 출발했다.
산을 타고 오르고, 계곡을 돌고, 온 세상이 초록으로 덮였다.
창밖으로 휙휙 지나가는 소나무, 아이들이 손을 흔드는 모습,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길들.
심장이, 조금은 설렜다.

몇 시간을 그렇게 흔들리다 산타 마리아 터미널에 도착했다.
내리자마자 느껴진 첫 인상은 "이거, 뭔가 다르다!"
길이 너무 조용했다.
아니, 그보다 더 놀란 건,
터미널 한쪽에서 염소 한 마리가 의자에 앉아(!) 사람처럼 쉬고 있었다.
(거짓말 아님. 심지어 앞발로 턱을 괴고 있었음.)

순간, 내 눈과 염소의 눈이 마주쳤다.

  • 0.3초 정적 -
    "형도 피곤했구나…"
    나는 괜히 인사를 건넸고, 염소는 뿔을 흔들며 무시했다.

오후엔 산타 마리아의 중요한 곳들을 걸었다.
교회, 오래된 종탑, 시장 골목까지.
그 골목은 시간도, 세상도 살짝 느릿해지는 곳이었다.
나는 시장 통로에서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대표 음식을 찾았다.

드디어 찾은 건, "엠판나다(Empanada)"!
바삭한 튀김 껍질 안에 고기와 야채가 가득.
한 입 베어무는 순간, 세상이 살짝 멈췄다.
(진짜다. 그 맛은, 약간 첫사랑 같은 거였다.)

배를 두드리며 숙소로 돌아오는 길,
하늘은 검푸른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나는 방 창문을 열고 야경을 봤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 바람에 스치는 야자수 잎 소리.
별 하나, 별 둘, 별 셋...

그렇게 나는, 산타 마리아의 첫날밤을 삼켜버렸다.
그리고 다음 꿈은, 아마 염소 형이랑 함께 꾸게 될 거였다.


《북부 루손주 걷는 시간》 제18화

6월 21일 ~ 6월 25일, 산타 마리아에서 흘러간 다섯 날들


6월 21일 – 점심에 눈 뜬 남자

눈을 떴다.
벽시계가 나를 비웃었다.
'12:31 PM'

“으악!”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니 머리가 핑 돌았다.

복도에서 마주친 숙소 아주머니가 힐끗 웃으며 말했다.
“Good morning, Sir!”
나도 쿡쿡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Good afternoon, Madam!”

근처 식당에 뛰어가 겨우 앉았다.
메뉴판을 훑을 시간도 없이
"Anything fast, please!"
직원은 싱긋 웃더니 국수와 작은 생선구이를 내왔다.

국수를 한 입 먹고 눈이 번쩍 떠졌다.
"Wow... amazing!"
그랬더니 옆 테이블에 있던 아이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말했다.
"First time eat?"
“Yeah. Best first time ever.”

오후엔 골목길을 돌아다녔다.
축구공이 내 발밑으로 굴러왔다.
아이들이 외쳤다.
"K-pop! K-pop!"
웃으며 공을 차줬더니 박수갈채가 터졌다.

오늘 나는, 산타 마리아 골목의 우상이었다.


6월 22일 – 비밀의 폭포에서 물싸움

숙소 앞에 서성이는 소년 둘.
"Sir! Waterfalls! Very nice! Go?"

어깨를 으쓱하고 오토바이 뒤에 탔다.
출발.
포장도로 → 흙길 → 돌길 → 고생길.
(거의 놀이기구 수준.)

소년이 소리쳤다.
"Sir, hold tight! Otherwise fly away!"
내 손은 오토바이 좌석을 붙들고 혼신을 다했다.

숲속에 숨어 있던 작은 폭포 도착.
맑은 물소리에 기분이 절로 맑아졌다.

소년 둘은 쿵쾅 뛰어들었다.
나도 신발을 벗고 돌 위를 터벅터벅 걷다가,
풍덩!

차가운 물이 온몸을 감싸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소년 하나가 웃으며 내 배를 쿡 찔렀다.
"Sir! Where is your six-pack?"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돌아오는 길.
길가 매대에서 바나나튀김을 발견.
할머니에게 물었다.
"How much?"
"Only 5 pesos, Sir!"
(세상에, 5페소로 행복을 샀다.)

바삭한 바나나튀김 한 입.
달콤함이 혀끝에 녹았다.
이 날, 진짜 인생 튀김이었다.


6월 23일 – 시장에서 약혼 당할 뻔한 이야기

시장 입구.
수박 냄새, 고기 굽는 냄새, 튀김 냄새가 뒤섞였다.

야채 코너를 구경하는데
갑자기 아주머니 한 명이 팔짱을 끼고 끌어갔다.
"Sir, come! My daughter very beautiful! Korean love!"

순식간에 포장마차 한가운데.
가족사진을 보여주며 신나게 설명한다.
"This is my daughter. 18 years old. Look, very nice teeth!"
(나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왜지?)

커피 한 잔이 손에 쥐어지고,
"Next time, marry, okay?"
말을 끝내기 전에 나는 “Thank you, Mom!” 하고 도망쳤다.

시장 골목을 도망치다 만난 빵집.
갓 구운 판데살 냄새에 이끌려 또 들어갔다.
빵을 한 입 베어 물자, 사장님이 말했다.
"Korean boy eat a lot, strong boy!"
"Yes, strong... in stomach only!"

(웃음 속에 빵 부스러기가 튀었다.)


6월 24일 – 산 위에서 소나기와 무지개

아침, 로비에서 배낭 큰 톰을 만났다.
"Going hiking?"
"Yeah, come along?"

그래서 산으로.
오르막길 초반에는 싱싱했다.
30분 지나자, 숨이 '삑삑'거렸다.

톰이 농담했다.
"Mate, you climb like snail!"
"Thanks. Snail is wise animal."
(그렇게 서로 놀리며 올라갔다.)

정상에서 본 풍경은 환상적이었다.
구름 아래 산타 마리아가 그림처럼 펼쳐졌다.

돌아가는 길, 하늘이 시커멓게 변했다.
그리고…
쏴아아아!

소나기 속을 미끄러지듯 달렸다.
길 옆 웅덩이에 발이 빠지는 작은 해프닝도 있었다.
톰이 깔깔 웃으며 말했다.
"You found a swimming pool, mate!"

숙소에 도착할 즈음.
무지개가 하늘을 가로질렀다.
우리는 그냥 멍하니 무지개를 바라봤다.

비 맞은 하루는, 그렇게 무지갯빛으로 끝났다.


6월 25일 – 마지막 밤, 아이스크림과 별빛

마지막 날.
오전은 느릿느릿 흘렀다.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렀다.
망고맛 아이스크림을 들고 거리를 걷는데,
갑자기 꼬마 하나가 내 아이스크림을 핥고 도망갔다.

"Hey! My ice cream!"
뒤돌아본 꼬마가 씩 웃었다.
"Sharing is caring, Sir!"
(이걸 귀엽다고 해야 하나, 슬프다고 해야 하나.)

오후, 작은 교회에 들렀다.
낡은 나무 의자에 앉아 조용히 기도했다.
‘이 따뜻한 도시가, 앞으로도 변하지 않기를.’

저녁, 시장 구석의 포장마차에서 로미를 시켜먹었다.
면을 후루룩, 국물을 쭉 들이켰다.
그리고 주인아저씨와 짧은 대화를 나눴다.
"First time here, Sir?"
"First time, but feels like home."

밤, 숙소 옥상에 올랐다.
하늘 가득 별.

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산타 마리아야, 고마워. 나중에 또 올게.
좀 더 천천히, 좀 더 깊이."

별들이 눈을 깜박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내 산타 마리아의 시간은 별빛 속으로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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