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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 루손주 걷는 시간》 11화/12화

philippines7641 2025. 4. 19.
《북부 루손주 걷는 시간》 11화/12화

《북부 루손주 걷는 시간》

제11화: 사가다의 골목에서, 피터와 내 여행은 시작되었다


6월 4일 — 동굴, 박쥐, 그리고 말 많은 독일인

오늘의 첫 일정은 사가다의 명물 서머쏘그 동굴(Sumaguing Cave).
가이드와 함께 내려가는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Excuse me! You guys also going down? This is my fourth time! I’m kind of a cave expert.”

— 독일인이다. 이름은 ‘안나’.
피터가 소곤댔다. “그럼 우리도 네 번째인 척하자.”
— 그래서 우리는 안나 앞에서 계속 “여기 미끄럽지? 지난번에도 여기서…” 이런 식으로 말하며 내려갔다.

진짜 미끄러웠고, 피터는 슬리퍼를 벗고 맨발로 걷기 시작.
“진정한 동굴 체험은 발바닥으로 느끼는 거야.”
— 10분 후 그는 진심으로 후회했다.

동굴 안에서 박쥐가 머리 위를 스쳤고, 가이드는 말했다.
“그건 행운이에요. 머리 위로 지나가면 소원이 이루어져요.”
— 피터는 조용히 소원을 빌었고, 나는 “제발 피터가 내 앞에서 안 넘어지게 해주세요”라고 빌었다.

밖으로 나와 물 한 병을 나눠 마시며, 피터는 말했다.
“내 인생도 좀 미끄럽긴 했지만, 나쁘지 않았던 것 같아.”
— 응, 슬리퍼도 미끄럽고, 네 농담도 미끄럽다.

저녁은 이가도(igado), 사가다식 돼지고기 간장볶음.
현지 식당 아주머니가 말했다.
“이건 우리 아버지가 만들던 방식 그대로야.”
피터는 두 그릇 먹고, “이건 내 필리핀의 맛이다.” 선언했다.

숙소에서 캔 맥주를 마시며, 피터가 말했다.
“나는 사실 한국 오려고 했었어. 근데 코로나 때문에 못 갔지.”
“…그 대신 필리핀에서 나랑 만났네.”
“응. 좋게 말하면 운명이고, 안 좋게 말하면 우연이지.”
— “나는 그냥 네가 술 살 사람 필요했던 것 같아.”
우리는 웃었다.


6월 5일 — 절벽 위에서, 그리고 바나나튀김 여왕

오늘은 에코 밸리와 매달린 관.
가는 길, 우리는 길을 잘못 들어 버렸다.
그때 한 아주머니가 다가왔다.
“잘못 왔어요. 절벽은 이쪽이에요.”
그분은 길 안내도 해주고, 중간에 바나나튀김도 나눠줬다.

“이건 사가다 바나나로 만든 거야. 시중 바나나랑 달라.”
정말 달았다. 그리고 바삭했다.
피터는 진심 어린 눈빛으로 “당신은 바나나 여왕입니다…”라고 인사했다.
— 여왕은 웃었고, 우리는 절벽 위에 섰다.

매달린 관을 보며 피터는 조용해졌고, 말없이 종이 한 장 꺼내 뭔가를 썼다.
“너 뭐 써?”
“그냥… 내 아버지 생각나서.”
조용히, 그냥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날 저녁은 피노요크(Pinuneg) — 피그 블러드 소시지.
먹기 전에 피터는 망설였지만, 한 입 후엔 말했다.
“이건… 피보다 더 진하다.”
— 뭔 소리야, 피로 만든 건데.

술은 산미겔 라이트 두 병.
오늘은 좀 감성적으로, 피터가 말했다.
“나, 사실 독일 떠날 때 아무 계획 없었어. 그냥 도망치고 싶었어.”
“그리고 필리핀 와서 뭐 찾았어?”
“…그래, 나도 생각 중이야. 적어도 지금은, 괜찮은 동행은 찾은 것 같아.”
— 그 말에 맥주가 달았다.


6월 6일 — 논과 계단과 갑자기 나타난 오토바이 청년

오늘은 봉아오 계단논.
하지만 걸어가는 길에서 갑자기 쏜살같이 나타난 청년이 오토바이 타고 말 걸었다.
“Sir, you want shortcut? I have cousin guide.”
— 피터는 신이 나서 “YES!” 외쳤다.

결국 우리 둘 다 오토바이 뒷자리에 타고, 바람을 가르며 논 근처까지 갔다.
가이드는 조카였고, 이름은 ‘지노’.
지노는 우리에게 논에 발 담가 보라고 권했다.
“행운 들어와요. 발로 받아요.”

논을 걷는 동안, 피터는 계속 카메라로 나를 찍었다.
“네가 행복해 보여서.”
— “진흙 때문에 찡그린 건데?”

저녁은 키닐라오(Kinilaw), 생선회 비슷한 음식.
레몬즙과 식초에 절인 생선이 입 안에서 터졌다.
피터는 자기 고향에도 비슷한 요리가 있다며 잠시 추억에 잠겼다.

술은 이번엔 레드홀스 맥주 두 병.
강한 도수에 피터가 살짝 취했다.
“넌 왜 이렇게 여행하는 거야?”
“…어디까지 가면 내가 뭘 찾을 수 있을지 궁금해서.”
“근데 그 ‘뭘’이 뭔지도 모르는 거지?”
“…응.”
우린 그렇게 말없이 한참을 앉아 있었다.


6월 7일 — 안개 속에서 길을 잃고, 마음은 더 가까워진 하루

아침, 사가다엔 안개가 아주 두껍게 깔렸다.
정말 앞이 2미터도 안 보이는 수준.
우리는 오늘 *봄빼잉 동굴(Sumaguing Cave)*을 가기로 했지만, 피터가 첫마디로 “오늘은 시력 대신 촉으로 가자”고 선언했다.

가는 길에 만난 현지인 가이드 ‘Mang Reggie’.
자신은 “동굴을 수백 번도 넘게 들어갔다”며,
“여긴 GPS도 소용없어, 마음으로 기억해야 해”라는 명언을 날렸다.

— 마음으로? …나는 불안했고, 피터는 흥분했다.

우린 슬리퍼를 벗고 맨발로 미끄러운 동굴 속을 내려갔다.
차가운 석회암과 작은 폭포, 박쥐 냄새, 그리고 촉촉한 공기.
피터가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자마자,
“이건 내 여행의 하이라이트야!” 외치며 웃었다.

— 나는 다급하게 살펴봤다. 엉덩이 괜찮은지. 물론, 겉으로는 “크게 다친 데 없지?”라고만 물었다.
(…속으로는 "쫌 아파봐라" 생각했다. 너무 신났었거든.)

동굴 밖으로 나왔을 땐 이미 정오.
허기를 달래려 작은 푸드카트에서 chicken mami 두 그릇을 시켰는데,
주인 할머니가 갑자기 우리에게 “너네 커플이야?”라고 물었다.
피터는 “그렇게 보이나요?”
나는 “아니에요!!”
— 동시에 말했는데, 이미 주인 할머니는 우리 컵에 하트 모양 고추를 올리고 있었다.

오후엔 Echo Valley를 향해 걷기 시작했는데…
이건 ‘트래킹’이 아니라 ‘트레킹’도 아닌, 거의 ‘생존’.
우연히 길을 잘못 들어 현지 묘지 방향으로 갔다가, 나무 뒤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염소 떼에 둘 다 깜놀.
— 피터는 놀라서 뒷걸음질 치다가 진흙에 빠졌고, 나는 비명 지르다 현지 학생 무리에게 들켰다.
학생 중 하나가 웃으며 “Sir, welcome to real Sagada!”
— 그 순간, 이 도시가 우릴 시험하는 느낌이 들었다.

해질 무렵, 길가에서 딸기쨈을 파는 할머니를 만났다.
피터가 지나치며 “딸기잼은 맛있는데 삶은 더 달콤했으면 좋겠다”고 말하자,
할머니는 그를 가만히 보더니 작은 병을 하나 덤으로 줬다.
“이건 널 위해 만든 거다.”
— 뭐야, 이 시적인 상황. 피터는 약간 울컥했고, 나는 약간 질투했다(?).

저녁엔 사가다의 유명한 *요기 레스토랑(Yoghurt House)*에서 현지식 정식과 요거트 디저트.
피터는 메뉴판을 보며 “필리핀 음식엔 어떤 ‘위로’가 있어.”
“짠데 달고, 뜨거운데 부드럽고… 딱 사람 같아.”
나는 “너, 오늘 감성 넘치는 거 약 먹었어?”라고 웃었지만, 사실 나도 동의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맥주와 계란칩을 사서,
작은 테라스에 앉아 하루를 정리했다.
피터는 내게 진지하게 물었다.

“혹시 언젠가 이 여행을 글로 쓸 거야?”
“…응. 아마도. 그리고 넌 중요한 조연이야.”
“조연은 싫어. 나는 너랑 동급 주인공이고 싶어.”
“…그럼 공동 주연.”
— 서로 말 없이 건배했다. 바람은 살짝 차고, 맥주는 그만큼 더 시원했다.

그날 밤, 사가다의 안개는 여전히 짙었지만,
우린 서로의 이야기 속에서 길을 잃지 않았다.


6월 8일 — 사가다의 마지막 밤, 그리고 서로의 이야기

오늘은 특별한 일정 없이 조용히 동네를 걷기로 했다.
마을 입구에 있는 *사가다 위빙 센터(Sagada Weaving)*에 들러 피터는 천 가방 하나를 샀다.
“여기선 ‘기념품’보다 ‘기억’을 사는 거지.”
— 그 말이 멋있어서 적어두었다. 나중에 써먹어야지.

점심은 현지식 ‘판싯 칸톤’, 그리고 거리에서 파는 스모키드 핫도그.
— 필리핀의 패스트푸드답게 소스는 형광 주황색.
피터는 한 입 먹고 “유럽에는 절대 없는 맛이야. 이건… 미래다.”
— 나는 그걸 들으며 코로 판싯 뿜을 뻔했다.

오후엔 작은 언덕 위 공동묘지로 올라가 해질녘 풍경을 보았다.
사가다 마을이 아래로 조용히 내려다보이고, 붉은 하늘이 산을 물들이는 그 시간.
우린 말없이 앉아있다가, 피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 오길 잘했어.”
“…왜?”
“이 도시엔 소음이 없어. 대신 나 자신이 들려.”
“…뭐래, 좀 멋있네.”
“진짜야. 네가 아니었으면 그냥 스쳐갔을 도시였을 텐데.”

그날 저녁, 우린 바베큐 플래터와 사가다 맥주 한 병씩을 시켰다.
— 음식은 불향 가득했고, 분위기는 묘하게 담담했다.
피터는 갑자기 물었다.

“넌 여행하면서 뭐 찾아?”
“…그냥… 익숙한 걸 벗어나서 나를 다시 보는 거?”
“난 도망친 줄 알았는데, 사실은 돌아가고 있었나 봐. 이 여행은 나한테 그런 거야.”
“…이제 곧 바나웨 가잖아. 거긴 또 뭐가 있을까?”
“어쩌면 또 우리가.”
— 우린 둘 다 웃었다.

그 밤, 나는 깨닫는다.
피터와의 이 여행은 단순한 동행이 아니라, 어떤 기억이 되었단 걸.


《북부 루손주 걷는 시간》

제12화 — 바나웨로 가는 길,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단 위를 걷다

2025년 6월 9일

사가다의 이른 아침.
햇살은 부드러웠지만 공기는 칼같이 찼다.
피터와 나는 작은 배낭을 둘러메고 6시 30분,
숙소를 나섰다.
조용한 골목을 지나 GL Trans 터미널에 도착했을 땐,
이미 버스 옆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있었다.

“오늘은 평일인데 왜 이렇게 많지?”
“다들 월요일 피해서 움직이나봐.”
피터와 나는 웃으며 말했지만, 그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가다 → 바나웨 / 오전 7시 30분 버스 출발

우리가 탄 GL Trans 지프형 버스는
20명 정원이지만 실제로는 35명 가까이 타 있었다.
어린아이, 닭 든 상자, 옥수수 자루, 배낭, 사람, 사람, 또 사람.

좌석은 이미 가득 찼고, 피터와 나는 통로에 앉았다.
몸을 기대고 있을 벽조차 없이,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우리는 출발했다.

첫 10분은 웃었다.
20분이 지나자 입을 다물었다.
30분 후, 커브길에서 바퀴가 절벽 가까이 닿았을 때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피터가 내게 말했다.
“야... 이런 건 동남아 익스트림 투어에 넣어야 하는 거 아냐?”
나는 창밖을 보지도 못한 채,
“그냥... 살아서 바나웨에 도착하자.”라고 말했다.
온몸이 땀범벅이 되었고, 어떤 승객은 토를 했고,
기사 아저씨는 아무렇지 않게 라디오를 틀고 휘파람을 불었다.

도로 옆은 낭떠러지, 반대편에서 오는 트럭과의 근접 조우.
피터는 말이 없어졌고, 나는 나도 모르게 기도를 했다.


오전 11시 10분, 바나웨 도착 — 멀쩡히 살아서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며 박수를 쳤다.
“야, 우리 살아있다!”
그 말에 웃음이 터졌고, 주변 필리핀 현지인들도 따라 웃었다.
그게 바로 여행이었다.

터미널에 내리자마자, “투어? 가이드? 숙소?”라는 말들이 쏟아졌지만
우리는 그보다 먼저 숨을 고르는 시간이 필요했다.

근처 카페에 들어가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미리 찜해둔 숙소인 Rice Terraces View Inn을 검색했다.
리뷰는 좋았고, 가격도 괜찮았다.


숙소: Rice Terraces View Inn

트라이시클을 타고 언덕길을 10분 정도 올라가자
작고 아담한 숙소가 나타났다.
창문은 열려 있었고, 거기서 바나웨 계단식 논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진짜 그림처럼,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조용해지는 풍경.

“이 풍경은 돈이 아니라… 살아서 도착한 보상이다.”
피터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창가에 앉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피터와의 대화, 계단 위에서의 사색

우리는 숙소 근처 전망대로 올라가
논을 바라보며 한참을 앉아 있었다.
피터는 오래된 여행자처럼 말했다.
“사실, 이 여행에서 뭐 하나 멋진 걸 찾으려는 건 아닐지도 몰라.
그냥 이렇게 네 옆에 앉아있는 이 시간이 좋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누군가와 함께 있는 고요한 시간’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란 걸 깨달았다.


저녁: 바나웨 스타일의 저녁 한 상

근처 식당에서 *에따그(Etag)*와 고구마 잎 된장국,
그리고 현지식 찐 바나나와 마늘밥을 주문했다.
피터는 이 모든 걸 맥주 한 캔으로 마무리했고,
나는 뒷마당에서 만든 필리핀 산쵸 한 모금에 감탄했다.


숙소로 돌아온 밤, 발코니에서

별이 지붕처럼 쏟아지던 밤.
우리는 발코니에 나란히 앉아
그날의 이야기와,
내일 우리가 만나게 될 바나웨 계단식 논에 대해 이야기했다.

“계단 위를 걷는 건, 사람의 삶을 걷는 것과 같아.
천천히, 한 칸 한 칸 올라가면서
뒤돌아보면 또 아름답고.”

피터는 그 말을 듣고 조용히 맥주잔을 들어올렸다.
“내일은, 좀 덜 흔들리는 길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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