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부 루손주 걷는 시간》
7화. 다구판에서의 5일, 물 위를 걷는 법
5월 22일, 이른 아침.
창밖은 안개가 내려앉은 듯 뿌옇고, 지프니 소리는 아직 들리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옷을 입고, 신발 끈을 조였다. 오늘은 도시를 걷는 날.
아니, 도시가 나를 걷게 할 날이다.
호텔 몬데에서 나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다웰강(Dawel River).
이 도시가 '물의 도시'라 불리는 이유를 직접 보고 싶었다.
강변에는 대나무로 만든 배가 여러 척 정박해 있었고,
천천히 나아가는 배 위에서 바람이 귓가를 스쳤다.
가끔은 지역 고등학생들이 민요를 부르며 배 안내를 돕기도 했다.
그 목소리는 한 편의 기도처럼 들렸다.
강 끝에서 내리자, 현지인이 **방우스 양식장(Bangus Farm)**을 알려줬다.
“이쪽이에요. 이 물고기들이 우리 도시를 먹여 살려요.”
물 위에 떠 있는 뗏목 위로 올라서자, 끝없이 이어진 그물망 안에서
은빛 물고기들이 튀었다.
아이들이 손으로 직접 먹이를 뿌리는 체험도 있었고,
그 작은 생명들이 물 위를 튀며 반응하는 모습은…
도시의 심장 소리를 듣는 기분이었다.
점심 무렵, 트라이시클을 타고 **통달리간 블루 비치(Tondaligan Blue Beach)**로 향했다.
바다보다도 오래된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해변에 박혀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때 미군 벙커였어요.”
현지 아저씨가 가르키며 말했다.
벙커 위엔 아이들이 웃으며 올라가 뛰어놀고 있었다.
전쟁의 흔적 위에 평화가 놓여 있는 느낌이었다.
해변에서 잠시 쉬다가, 가까운 Japanese Garden으로 향했다.
낡은 정자, 작은 연못, 그리고 양국의 깃발.
이곳은 전쟁의 기억과 화해의 상징이었다.
지나치기 쉬운 작은 공원이었지만,
물 위의 도시가 품고 있는 깊이를 느끼게 했다.
오후엔 다시 중심가로 돌아와, **다구판 나이트 마켓(Dagupan Night Market)**을 찾았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자, 시장은 다른 도시가 되었다.
등불 아래에서 연기가 오르고, 오징어 굽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바비큐, 튀김, 시니강, 길거리에서 팔리는 방우스 시식까지—
배가 아니라 영혼이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낯선 도시에서, 익숙한 정을 느낀 건 밤이었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 **CSI 몰(CSI Market)**에 들러
산 미구엘 맥주 한 캔과 치차론을 샀다.
이 도시에서의 하루를 함께 마무리할 조용한 친구들.
숙소 창가에 앉아, 문득 아침에 만난 강과 물고기들이 떠올랐다.
"5월 22일. 다구판 둘째 날.
도시는 물로 말을 건다.
나는 오늘,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나는 내일도 걷기로 했다.
이제는 도시가 나를 걷게 만드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5월 23일. 물고기들의 도시에서, 나는 천천히 익어간다
아침 7시, 호텔 근처 **시장통(Kepayan Public Market)**을 걸었다.
고등학생 두 명이 학교 가는 길에 손을 흔들었고, 생선 좌판 아주머니는 내가 외국인인 걸 바로 알아봤다.
“방우스? 플레시 프롬 이모닝!”
그녀는 방금 잡아온 **방우스(Bangus)**를 내게 자랑했고, 나는 그 은빛 물결에 눈이 멈췄다.
시장 뒷골목, 좁은 길로 접어들자 작은 가정집에서 굴뚝 연기가 피어올랐다.
누군가 아침을 짓고 있었고, 나는 거기서 흘러나오는 마늘 기름 냄새에 유혹되어
**작은 식당(Kubo Karinderya)**에 들어갔다.
다구판식 **방우스 토실로(Bangus Tocilog)**를 시켰더니,
주인 할머니가 말했다.
“우리 마을 방식이야, 달걀 노른자 안 터뜨리고 굽지.”
음식이 오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나는 그동안 벽에 걸린 십자가, 오래된 졸업사진, 마닐라를 다녀온 조카의 편지들을 바라봤다.
이 식당은 한 사람의 인생이 걸린 박물관 같았다.
정오. 트라이시클을 타고 Manaoag 대성당으로 향했다.
가톨릭의 순례지.
도착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초를 켜고 있었고, 어떤 청년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도 그 틈에 앉아 조용히 기도했다.
바람이 천천히 불었고, 어쩌면 신은 그 바람을 타고 우리에게 말을 거는지도 몰랐다.
돌아오는 길, CSI Mall 지하 푸드코트에서 오후를 보냈다.
에어컨 바람, 쇼핑백을 든 엄마들, 유튜브를 보며 웃는 아이들.
그 일상은 나에겐 신비였다.
5월 24일. 방우스 축제의 그림자, 그리고 나의 오후
오전 9시. 다구판 시청 앞 광장에서
지역 청소년들이 방우스 페스티벌 리허설을 하고 있었다.
드럼 소리, 깃발 춤, 방우스 모형을 뒤집어쓴 소년이 열심히 뛰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벤치에 앉아 그 리듬을 따라 발을 움직였다.
어느새 옆자리에 앉은 중년 남성이 말했다.
“우리는 축제 하나로 먹고 살아.
근데 코로나 때 다 문 닫았었지.
그래도 봐, 지금 다시 뛰고 있어.”
정오 즈음, 다구판대학교(University of Pangasinan) 근처 카페에 들렀다.
젊은이들로 가득한 이곳에서, 나는 커피 한 잔을 시키고
옆 테이블의 대학생들이 나누는 대화를 몰래 들었다.
“졸업하면 마닐라로 갈 거야.”
“근데 마닐라는 너무 빨라. 여긴 느려서 좋아.”
나는 그 말이 인상 깊었다.
그래, 이 도시는 느리지만, 그 느림 속에 ‘자기만의 리듬’이 있었다.
오후에는 **파시부욘 공원(Pasibeon Park)**을 걸었다.
햇살은 눈부셨고, 강을 따라 걷는 연인들, 장기를 두는 노인들,
거기엔 어떤 큰 서사도 없었지만,
모든 순간이 영화 같았다.
5월 25일. 다구판의 뒷골목, 그 속의 시인들
이른 아침, 오늘은 구글에도 안 나오는 동네 **보니파시오 가(Bonifacio Street)**로 들어갔다.
길가에서 타이포그래피처럼 어지럽게 적힌 구호들.
“방우스는 생명이다.”
“아이들을 지켜라.”
그리고 벽에 스프레이로 쓰인 문장 하나.
“Don’t leave yet. You haven’t seen the river cry.”
그 문장을 따라, 다시 다웰강으로 향했다.
이번엔 배가 아니라 강변 산책로를 걸었다.
자전거 타는 아이들, 낚시하는 할아버지, 쓰레기를 줍는 아주머니.
나는 그들의 일상이 쌓아올린 ‘도시의 시’ 속을 걷고 있었다.
점심, 우연히 만난 청년 둘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형, 어디서 왔어요?”
“한국!”
“우리 K-드라마 좋아해요.
근데 다구판엔 아무도 안 와요.”
나는 그들과 함께 포장마차에서 로컬 감바스를 시켜 먹었고,
그들 중 한 명은 다구판에서 래퍼가 되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형, 나중에 유튜브에 나올지도 몰라요.”
나는 웃으며 “꼭 나온다, 진짜”라고 답했다.
5월 26일. 작별의 날, 물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침 8시.
짐을 다 싸고 체크아웃했다.
그러나 마음이 떠날 준비가 되지 않아, 다시 **강 쪽 카페(Riverside Brew)**에 앉았다.
이곳에서 며칠 동안 마주친 얼굴들이 흘러갔다.
버스 정류장 아저씨, 지프니 운전사, 방우스를 손질하던 아주머니,
웃으며 치차론을 던져주던 시장통 소년.
정오.
다구판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내 앞에 앉은 여학생은 핸드폰으로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언젠가 이 도시를 떠나겠지… 그래도 나는 여길 기억할 거야.”
나도 기억할 것이다.
다구판.
이 도시의 속도, 냄새, 방우스의 짠맛, 그리고 물 위에 반사된 오후의 햇살까지.
“5월 26일, 작별.
다구판은 조용히 등을 돌렸다.
하지만 나는 아직, 물 위를 걷는 중이다.”

《북부 루손주 걷는 시간》
8화. 바기오행 버스, 그리고 차가운 공기 속으로
2025년 5월 26일, 다구판 Victory Liner 터미널, 오후 1시.
이곳에서 바기오로 가는 버스표 한 장을 손에 쥐었다.
어쩌다 보니 점심을 먹지 못했다. 터미널 안에 있던 작은 매점에서
스팸마요 삼각김밥 비스무리한 간식 하나, 그리고 작은 주스 팩을 급히 샀다.
에어컨이 시원하게 나오는 버스 안, 의자에 앉자마자 무언가 놓친 듯한 허전함과
길을 떠난다는 이상한 흥분이 뒤섞여 올라왔다.
버스는 곧 출발했고, 다구판 시내를 빠져나가는 동안
내 옆자리에는 중년의 필리핀 남성이 앉았다.
그는 바기오에서 딸을 만나러 가는 중이라고 했다.
딸은 세인트루이스 대학에서 간호학을 공부 중이란다.
그는 딸 이야기를 하면서 눈가에 살짝 웃음기를 머금었고,
나는 그 표정을 보고 괜히 뭉클해졌다.
창밖으로 보이는 계단식 논과 흙먼지 날리는 작은 마을들,
그리고 점점 고도가 높아지면서 바뀌는 나무들의 종류가 보였다.
망고 나무 대신 소나무가 보이기 시작하자
'이제 진짜 바기오로 가고 있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
커브길이 많아 멀미가 날 수도 있었지만,
피곤함 덕에 눈을 붙였다가 금세 다시 깼다.
그리고 창밖으로 안개가 깔린 바기오 외곽이 눈에 들어왔을 때,
그 순간은 사진으로도 담기 어려운 묘한 감정이 스쳤다.
오후 4시 45분경, 바기오 Victory Liner 터미널 도착.
가방을 메고 터미널을 나오자마자 산속 도시의 냄새가 훅 들어왔다.
차가운 공기, 땅에서 올라오는 흙 냄새, 그리고 멀리서 풍겨오는 숯불 바비큐 향.
이게 바기오구나. 첫 느낌은 딱 이거였다 —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싶어지는 도시’.
걸어서 숙소로 향했다. SM 바기오 근처,
조용한 골목길에 있는 작은 게스트하우스.
방 안에 짐을 놓고 잠시 누웠다가,
바기오의 저녁을 만나기 위해 다시 밖으로 나왔다.
번햄파크 주변에는 저녁 산책하는 연인들,
학생들 무리, 관광객들이 섞여 있었다.
나는 길거리 감자튀김, 그리고 치킨 바비큐 꼬치를 사 먹었다.
그러다 눈에 띈 작은 로컬 식당에서
바기오의 명물 '벵겟 뱅곰(Benguet Bangus)' 구이와
시니강 나 바부이(Sinigang na Baboy) 한 그릇을 시켰다.
뜨끈한 국물과 찌는 듯한 도시와는 다른 차가운 공기,
묘한 조합이 입안에서 여행이란 단어를 다시 떠올리게 했다.
식사를 마치고 SM 몰 마트에 들렀다.
샌 미겔 캔맥주 한 캔, 그리고 마른 오징어 포장 안주 하나.
숙소로 돌아가는 길, 거리는 조용했고,
차가운 바람 속에서 사람들의 목소리만 선명하게 들렸다.
방 안에서 조명을 낮추고, 맥주를 마셨다.
창밖으로는 소나무 사이로 희미한 빛,
멀리서는 클락락 하는 개 짖는 소리.
그 사이로 나는 오늘 이 하루를 천천히 되짚어보았다.
그리고 내일은... 바기오에서 뭘 해볼까?
세션로드를 따라 걸을까, 아니면 라이트 파크를 갈까?
이런 생각들 속에서 서서히 눈꺼풀이 내려왔다.
바기오의 밤은 그렇게 나를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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