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침 6시, 필리핀의 라디오는 하루를 어떻게 깨우는가
어느 조용한 새벽, 내가 머물던 필리핀의 작은 시골 마을.
아직 해는 뜨지 않았지만, 창문 틈으로 쿨럭거리는 닭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쿨럭, 끼오오오… 뭔가 기운찬 듯하면서도 어딘가 게으른 울음.
그때였다.
부엌 쪽에서 라디오가 켜졌다.
찰칵, 딸깍, 그리고… 삐이이익—
“Philippine Standard Time, alas sais ng umaga. This is DZBB 594, your Super Radyo.”
라디오라는 매체가 아직 살아 있는 이 나라에서는,
아침 6시는 하루의 출발점이자, 작은 마을의 심장이 뛰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누군가 물을 끓이고, 누군가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라디오는 그 곁에서 말을 걸어온다.
“Magandang umaga, Pilipinas!”
— 좋은 아침이에요, 필리핀!
그 목소리는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다정하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말을 거는 듯한 솔직한 인사.
그리고 이내 흘러나오는 음악.
느긋한 기타 소리와 함께 흐르는 90년대 OPM 발라드.
Freestyle의 "Before I Let You Go", 아니면 Apo Hiking Society의 "Panalangin".
한국의 7080 감성과도 어딘가 닮은 그 정서.
조금 후, 뉴스가 흐른다.
“Sa mga balita ngayong umaga…”
아침 뉴스는 간결하다.
마닐라 시내 교통 정체 상황, 오늘의 환율, 태풍 동향, 쌀값 동향, 대통령의 어제 발언 요약.
그리고 중간중간 “기침 소리 조심하세요, 여전히 독감이 유행 중입니다.”
이런 말도 빼놓지 않는다.
뉴스 앵커의 목소리는 약간 마른 목소리인데, 이상하게 믿음이 간다.
그 목소리 아래, 어딘가에서 시레나(경적) 소리가 희미하게 섞여 들어온다.
도시가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는 증거다.
이제 DJ가 다시 돌아온다.
“Shout out to Kuya Jun, frying eggs in Cebu! Kumain ka muna bago pumasok.”
라디오에서는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말을 건다.
마치 혼잣말 같지만, 그건 이 나라의 일종의 아침 기도 같다.
DJ는 이윽고 찬송가를 짧게 읊조리고, “God bless your day,”라고 말하며 노래로 넘어간다.
이쯤 되면 이미 바깥은 밝아지고 있다.
가게 셔터가 열리고, 국숫집에서는 판싯을 볶는 소리가 들린다.
길모퉁이의 트라이시클 기사들도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하고, 그들 라디오에서는
“Boom Tarat Tarat” 같은 익살스러운 노래가 흘러나온다.
어딘가에선 “Dance Remix – TikTok Viral Hits 2023” 같은 유튜브 음원이 스피커에 연결되어 울려퍼진다.
혼돈이다. 하지만 이질적이지 않다.
모두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하루를 맞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필리핀에서 라디오는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다.
그건 하루를 여는 의식이며, "Gising na, buhay pa tayo." 라는 일종의 생존 선언이다.
그날 아침, 나는 마을의 작고 녹슨 라디오 소리 속에서 삶의 소박한 리듬을 들었다.
그리고 그 리듬은 오늘도 여전히 유효하다.
세상이 복잡해지고, 스마트폰이 모든 걸 집어삼키는 시대에도—
필리핀의 어느 집 마루에서는 여전히 작은 라디오가 하루를 깨운다.
그리고 그 속삭임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하루도 우리에겐 축복입니다. Let's start again."
《오후 5시, 라디오는 집으로 가는 길을 노래한다》
오후 5시.
태양이 아직 눈부신데, 벌써 거리의 그림자는 길다.
마닐라의 아스팔트는 하루 종일 덥혀져서, 발바닥 아래서 꿈틀거린다.
그리고 그 위로, 지프니 창문 너머에서 라디오가 터진다.
🎙️ “Magandang hapon sa lahat ng mga uuwi na! Kasama niyo pa rin ako, DJ Paul, dito sa Radyo5! Teka, traffic ka ba? Hayaan mong itong kanta ang magpakalma sa’yo.”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익숙한 선율이 흘러나온다.
James Reid의 “Bonfire Love”일까, 아니면 Moira의 “Tagpuan”일까.
그 순간 라디오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다.
그건 피곤한 하루를 마무리짓는 작은 의식이다.
아무도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 수 있는 그 느낌.
“이제 집에 가는 거구나.”
어느 트라이시클 기사 아저씨는 손에 작은 FM 라디오를 들고 있다.
그가 듣는 방송은 AM 뉴스 라디오.
이건 완전히 다른 장르다.
중후한 앵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Sa mga nag-aabang ng balita, narito na ang ating traffic update! Mabigat ang daloy mula Cubao hanggang Ortigas, at meron ding banggaan sa EDSA-Taft…”
라디오는 마치 도로 상황판처럼 작동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누구도 화내지 않는다.
오히려 DJ나 앵커의 멘트가 이동 중인 모든 이들의 공동체 의식을 만들어낸다.
"나만 막힌 거 아니구나."
"다들 지금 같은 마음이겠지."
카페 앞을 지나가면, 다른 스타일의 라디오가 들린다.
여기서는 K-pop이 나온다.
NewJeans, SEVENTEEN, BLACKPINK.
그리고 그 사이사이, Taglish(타갈로그+영어)로 말하는 DJ가 흥겹게 끼어든다.
🎶 “Grabe, ang init pa rin! Pero sige lang, stay cool with this next track from IU!”
그 순간만큼은 이곳이 마닐라인지 서울인지 구분이 안 간다.
라디오는 국경을 넘는 유일한 퇴근 친구다.
차가 막혀도, 덜컹거려도, 음악이 있으면 견딜 수 있다.
특히, 라디오 음악은 이어폰보다 덜 외롭다.
공유되는 공기 중의 사운드.
내 것 같으면서도 모두의 것 같은 위로.
그리고 오후 5시 30분.
방송은 약간의 변화를 맞는다.
기도 시간이 시작된다.
🙏 “Panginoon naming Diyos, maraming salamat po sa araw na ito. Patnubayan niyo po kami sa aming pag-uwi. Amen.”
필리핀의 일부 방송국은 퇴근 시간대에 ‘Angelus’라는 기도를 틀어준다.
불교국가에서 느껴본 적 없는 고요한 존중.
도로 위, 사람들은 갑자기 조용해지고, 라디오에서는 성가가 흐른다.
길바닥의 소란도 잠시 멈춘다.
그건 신기한 필리핀만의 ‘집으로 가는 의식’이다.
길거리 튀김 노점 뒤에 있는 라디오에서는 인기 토크쇼가 시작된다.
연애 상담이다.
DJ가 들어주는 척하지만 가끔 너무 웃겨서, 튀김이 목에 걸릴 정도다.
🗣️ “Ate, bakit mo hinayaan yung ex mong humiram ng 5,000 pesos ulit?! Naku, hindi na yan love, utang na yan!”
🤣🤣🤣
그걸 들으며 튀김을 뒤집는 아주머니도 웃는다.
지나가던 학생도 킥킥댄다.
그렇게 라디오는 사람들의 감정을 조율한다.
위로도 하고, 웃음도 주고, 생각하게도 만든다.
라디오는 항상 똑같은 듯하지만, 퇴근길마다 새로운 배경 음악을 만든다.
오후 5시의 필리핀 라디오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다.
그건 하루를 정리하는 편지이고, 도로 위의 합창이며, 집으로 가는 길을 감싸는 담요다.
막혀도 괜찮고, 더워도 괜찮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라디오 저편에서 말해주니까.
🎙️ “Relax lang, kaibigan. Malapit ka na sa bahay.”
🕔 오후 5시, 필리핀의 퇴근 시간은 소란스럽고도 느긋하다
어느 오후, 마닐라의 에드사 거리(EDSA)는 이유 없이 혼잡했다.
하지만 곧 이유가 명확해졌다.
시계는 5시 1분.
필리핀의 퇴근 시간, 그것은 작은 국가적 이탈이다.
일에서 집으로, 업무에서 삶으로. 그 경계선이 바로 지금, 이 시각이다.
필리핀의 퇴근 시간은 대체로 오후 5시에서 6시 사이다.
공무원, 은행 직원, 학교 선생님, 사무실 근무자—이들은 대부분 오후 5시에 퇴근한다.
하지만 마트, 쇼핑몰, 식당 종업원은 6시, 혹은 8시까지.
콜센터 직원은 반대로 오후 5시에 ‘출근’한다.
밤에 일하는 이들이 많은 나라다.
그래도 거리 풍경은 명확하다.
5시가 가까워지면, 거리에는 **‘서둘러 걷되 전혀 급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그들은 혼잡한 MRT(지하철)로, 트라이시클로, 지프니로 하나 둘 이동을 시작한다.
가끔 신발을 벗고 슬리퍼로 갈아신고 걸어가는 사람도 있다.
구두는 회사에 두고 가는 것이다.
"내일 또 신을 거니까."
지프니에선 퇴근송이 흐른다.
가장 흔한 건 "Anak"이나 "Forevermore".
그리고 그 사이사이, 지프니 운전사 아저씨의 험한 욕설과 웃음소리가 섞인다.
“Ang traffic, grabe!”
“Grabe talaga, pre.”
길거리 음식 노점은 5시부터 바빠진다.
바나나큐, 튀긴 튀김, ‘이스크람볼(ice scramble)’
“Boss, isa pong kwek-kwek!”
퇴근길에 꼭 뭔가를 먹어야 집에 간다는 철학이 있다.
한입 베어 물고, “휴~ 오늘도 살아남았다.”
고층 빌딩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무실 군단.
그중엔 셔츠 소매를 걷은 중간관리자도 있고,
에코백 하나 들고 간식 사러 나오는 신입도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퇴근 후의 시간이 진짜 자기 시간이라는 사실을 잘 안다는 것.
어떤 이들은 바로 집에 가고,
어떤 이들은 "inuman na tayo" (술 한잔하자)라며 바로 바(bar)로 간다.
맥주 한 병에 50페소.
퇴근 후의 삶은 싸지만, 진하다.
또 어떤 이들은 교회로 간다.
쇼핑몰 안의 작은 채플에,
퇴근한 사람들이 조용히 앉아 기도하고 있다.
“오늘 하루 무사히 지나감에 감사드립니다.”
그 기도가 라디오 방송보다 더 또렷하게 울린다.
퇴근 시간은 단순히 일의 끝이 아니다.
그건 필리핀 사람들에게 삶의 진짜 시작이다.
그들은 퇴근을 ‘탈출’이 아니라, 전환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퇴근길은 피곤해도 유쾌하고, 막혀도 흥겹다.
그 소란스러움 속엔 오늘 하루를 끝내는 사람들의
**"내일 또 해보자."**라는 조용한 각오가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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