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Series)/북부 루손주 걷는 시간

필리핀 《북부 루손주 걷는 시간》 27화/28화

philippines7641 2025. 6. 7.
필리핀 《북부 루손주 걷는 시간》 27화/28화

 


《북부 루손주 걷는 시간》

제27화 – 발레스테로스를 떠나, 투게가라오(Tuguegarao)로 가는 긴 여정길

2025년 7월 21일

필리핀 북부의 조용한 마을, 발레스테로스(Valleysteros).
이른 아침, 창밖으로 새들의 짧은 울음소리가 들리며 내가 머물던 작은 숙소 Balai Carmela Homestay의 창문이 붉게 물들었다. 평소보다 늦게 눈을 떴고, 곧장 떠나야 할 시간임을 직감했다. 아침 인사도 변변히 나누지 못하고, 주인 아주머니와는 엇갈린 손인사로 작별을 대신했다. “Take care, sir. Come back someday…” 그 말이 아직 귓가에 남아 있다.

짐을 챙겨 Ballesteros Bus Terminal로 달려갔지만, 이미 내가 타려던 버스는 출발해 버린 뒤였다. 그 순간, 허기와 피곤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시간은 이미 오전 9시. 인근의 Jollibee Ballesteros에 들어가 Lugaw with Egg Hot Choco를 주문했다. 익숙한 노란색 간판 아래, 낯선 도시의 익숙한 패스트푸드는 내게 작은 안정을 줬다.

그렇게 잠시 머무르며, 다시 다가온 ‘기다림’의 시간.
이제 나는 GV Florida Transport 버스를 타고 **투게가라오(Tuguegarao)**까지 가려 했지만, 그 거리와 시간은 예상보다 훨씬 멀고 길었다. 옆자리에 앉은 중년의 필리핀 남성이 나직하게 말했다.
“Sir, you will not make it to Tuguegarao today. Better to stay somewhere overnight. Maybe Abulug.”

처음 듣는 마을 이름. 어디인지도 모른 채, 알 수 없는 여행의 끄트머리를 따라가야 했다. 그게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Okay. Let’s see what happens.”

 

오후 2시, Abulug 도착
버스는 낮은 구릉과 좁은 강을 따라 달렸다. 창밖 풍경은 바쁘게 움직이는 듯하면서도, 어딘가 정적이 깃든 듯했다. 어린아이들이 맨발로 강가를 뛰놀고, 먼지 쌓인 창문 너머로는 열대의 햇살이 황금빛으로 번져 있다.

Abulug Junction에서 내려 근처 트라이시클 기사에게 물어 Casa Angela Lodge로 향했다. 낡았지만 단정한 이 로지에서 하루를 묵기로 한다. 땀에 젖은 옷을 벗고 찬물 샤워를 하니, 온몸이 생기를 되찾았다.

배가 고팠다. 걸어서 몇 분 거리의 식당 Kusina ni Kaka Abulug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작은 선풍기가 천천히 돌아가는 시골 식당. 메뉴판에는 익숙치 않은 현지 음식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식당 주인이 권한 Sinanglaw—진한 고기 국물에 쌉싸래한 곤약 같은 질감의 내장이 들어간 이 요리는 의외로 깊은 맛을 냈다. 옆 테이블에 앉은 현지 남자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곳의 삶의 리듬이 나에게 스며드는 듯했다. 그는 10년 넘게 이 마을에서 교사로 일해왔고, 아이들이 크면 투게가라오로 유학을 보낸다고 했다.

“Not much here,” 그가 말했다. “But it's peaceful. You’ll like the morning.”

 

2025년 7월 22일, 아침

정말로 그 말대로였다. 아침 6시, 눈을 뜨니 작은 마을에 안개가 내려앉아 있었다. 로지 앞 좁은 골목길은 고요했고, 멀리서 닭 우는 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렸다.
나는 근처 Abulug Market로 걸어가 Taho를 사 마셨다. 따뜻한 실크 푸딩과 카라멜 시럽, 살짝 뿌려진 사고 펄이 완벽한 조화를 이뤘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났다. “이래서 여행을 하지.”

마을 정류장에서 다시 GMW Bus에 올랐다. 옆자리에 앉은 대학생 Jayson은 처음엔 수줍어했지만 곧 말을 걸었다. 농업공학을 공부 중이라고 했다. 한국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했고, 특히 “한국은 진짜로 겨울에 눈이 와요?”라는 순진한 질문도 던졌다.

“와요. 많이요. 그래서 코트도 입어요.”
그의 눈이 반짝였다. “Someday, I want to see snow. Maybe in Korea.”

그 순간, 나는 이 낯선 땅에서 ‘다리를 건넌다’는 감정을 느꼈다. 창밖의 풍경은 점점 도시로 향했고, 드디어 투게가라오 시내가 눈앞에 펼쳐졌다.

 

오후, Tuguegarao 도착
Hotel Carmelita에 체크인하고, 잠시 땀을 식혔다. 호텔은 오래되었지만 위치가 좋고, 정문 근처에는 ATM도 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가벼운 셔츠를 입고 거리로 나섰다. 더운 날씨였지만 기분만큼은 가벼웠다.

저녁은 Billy Jack's Panciteria. 이곳의 명물 Pancit Batil Patung은 정말 특별했다. 달걀노른자와 간 고기가 올라간 볶음면, 그리고 곁들여 나오는 국물. 짭짤하면서도 고소한 풍미가 입안에 오래 남았다.
옆 테이블에 앉은 청년 둘은 맥주 한 병씩을 놓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나도 망설이지 않고 San Miguel Pale Pilsen을 주문했다.

그날 밤, 호텔 방으로 돌아오는 길.
도시는 조용했고, 바람은 따뜻했고,
나는 오늘 하루를 생각하며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아무 계획도 없었지만, 이렇게 길은 이어졌다.”


《북부 루손주 걷는 시간》

제28화 – 투게가라오, 나를 신비스러운 곳으로 데려간다

2025년 7월 23일(일) 오전 ~ 7월 28일(금) 저녁까지, 내게 힘을 주는 도시에서의 6박 7일

 

7월 23일 (일요일) – "조약돌의 전조"

 

하늘은 쨍했지만 이상하리만큼 고요했다. 투게가라오에 도착한 첫날, 공항을 나서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마호가니 나무들과, 멀리서 흘러나오는 오카리나 소리였다. 공항 근처 카가얀 강가를 따라 걷던 중, 나는 노인 하나를 만났다. 그의 피부는 강물처럼 거칠고 검었지만 눈빛만은 맑았다. 그는 내게 조약돌 하나를 건네주며 말했다.

“이걸 강에 던져보게. 이 도시가 자네를 받아들이면, 무언가 반응할 거야.”

나는 반신반의로 조약돌을 강물 속에 던졌다. 잠시 후, 아무 바람도 없는데 강 위로 잔잔한 소용돌이가 피어올랐다. 그 순간, 주변의 소음이 사라지고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7월 24일 (월요일) – "손수건과 화가"

성당을 돌아보다가, 어느 오래된 터널 앞에서 나는 하얀 손수건 하나를 주웠다. 구석엔 ‘C.S.’라는 수놓임이 있었다. 같은 날 오후, 거리의 작은 아트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던 중, 그 손수건과 같은 무늬의 스카프를 목에 두른 여인을 만났다. 그녀의 이름은 셀레나. 이 도시에 잠시 머물고 있는 화가였다. 그녀는 손수건을 보자 놀란 눈으로 말했다.

“그건… 제 약혼자가 예전에 가지고 있던 거예요. 10년 전 실종된 이후로 찾을 수 없었죠.”

그녀의 눈빛엔 슬픔보다는, 어떤 설명할 수 없는 평온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내일 Callao Cave에 함께 가자고 말했다. “그곳은 그의 마지막 흔적이 남아 있는 장소예요.”

 

7월 25일 (화요일) – "빛의 동굴에서의 고백"

Callao Cave. 동굴 안으로 들어가자, 입구로 들어오는 햇빛이 정확히 제단 위를 비추고 있었다. 마치 신이 매일 그 자리를 비추기 위해 태양의 방향을 조절해주는 것처럼.

셀레나는 무릎을 꿇고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빛이 가장 깊은 어둠을 안고 있다’였어요.”

그녀는 나에게 낡은 스케치북을 건넸다. 스케치북엔 남자의 뒷모습과 “나는 여기 있다”는 필체가 남겨져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순간, 동굴 벽이 미세하게 진동하는 듯한 환청이 들려왔다. 어쩌면 울리는 내 심장 소리였을지도 모르겠다.

 

7월 26일 (수요일) – "판싯, 술, 그리고 예언"

투게가라오의 명물 판싯 바틸 파퉁(Pancit Batil Patung)을 먹기 위해 로컬 식당 Billy Jack's에 갔다. 셀레나와 함께였다. 노란 면 위에 달걀과 간 고기가 올려진 이 음식은, 기대 이상으로 묘한 힘을 주는 맛이었다. 럼 한 병이 돌고 분위기가 무르익자, 셀레나는 내게 물었다.

“혹시… 꿈에서 붉은 하늘을 본 적 있나요?”

나는 고개를 저었지만, 이상하게도 머릿속에 빨갛게 물든 하늘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녀는 말했다. “붉은 하늘을 본 자는, 선택받은 자예요. 그 도시와 연결된 사람. 어쩌면… 당신은 그와 다시 연결될 수도 있어요.”

 

7월 27일 (목요일) – "엔릴레(Enrile)의 백색 남자"

도시 외곽 Enrile로 가는 시골 도로. 렌트한 스쿠터가 멈췄다. 근처 작은 민가에서 도움을 청하자, 백색 셔츠를 입은 창백한 남자가 나왔다. 그는 묘하게 옛 필름 사진처럼 느리게 움직였고, 그의 말투는 1970년대 영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다.

“그 손수건은… 내가 그녀에게 준 겁니다.”

나는 멍해졌다. 그는 조약돌 하나를 내 손에 쥐어주고 말했다. “셀레나는 아직 나를 찾고 있지만, 그녀가 앞으로 나아가려면 새로운 이정표가 필요하죠. 당신이 그 길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러곤 그 남자는 뒤돌아 걸어가더니, 나무 뒤로 사라졌다. 그 뒤엔 풀잎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7월 28일 (금요일) – "마지막 그림자와 붉은 물결"

도시에서의 마지막 날. 셀레나는 바나우에로 떠났다. 그녀는 많은 말을 남기지 않았지만, 손을 내밀며 작은 종이 쪽지를 건넸다. ‘루손 북부의 어느 계단 위에서, 우리는 다시 만날 거예요.’

나는 다시 강가로 갔다. 조약돌을 꺼내어 던졌다. 이번에는 확실히, 강물 위로 붉은 물결이 번졌다. 하늘은 붉게 물들었고, 먼 강 건너편에서 누군가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모습은 셀레나 같기도, 그 백색 남자 같기도 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투게가라오는 단순한 도시가 아니었다. 여기는, 나를 깨우는 도시였다. 숨겨진 과거가 속삭이고, 미래가 조용히 나를 부르는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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