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타

《북부 루손주 걷는 시간》 1화/2화

by philippines7641 2025. 4. 16.

 

《북부 루손주 걷는 시간》

1화. 마닐라, 떠나기 전날 밤

쿠바오(Cubao)의 밤거리, 조금은 지저분하고, 조금은 번잡하지만… 그 안에 묘한 매력이 숨어 있다.
여행을 떠나기 전, 도시는 나에게 조용히 묻는 듯했다.
“진짜 갈 거야? 이번엔 또 어디까지?”

그날 밤은 쿠바오(Cubao) 근처의 작은 게스트하우스에서 묵었다.
1박에 600페소. 뜨거운 물은 안 나왔지만, 창문 너머로 보이는 에자(EDSA)의 붉은 불빛은 뭔가 낭만적인 출발을 예고하는 것 같았다.

근처 세븐일레븐(7-Eleven)에 들어가니 진열대엔 라면, 통조림, 그리고 시원한 레드홀스(Red Horse) 맥주.
그래, 오늘은 맥주 하나로 충분하지.
마당 의자에 앉아 맥주 마시며 흘러가는 지프니(Jeepney)들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한 외국인 여행자가 다가왔다.
“Where you going tomorrow?”
“North,” 라고 짧게 대답했더니 그가 웃었다.
“Good direction. It’s wild out there.”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짐보다 마음을 싸야 한다.
혹시 그 마음이 너무 무거워서 버스가 출발하지 않으면 어쩌지, 그런 생각까지 들었던 밤이었다.


《북부 루손주 걷는 시간》
2화. 마닐라(Cubao) → 앙헬레스(Angeles)

새벽 6시, 쿠바오(Cubao) 터미널의 공기는 축축했고, 어딘가 기름 냄새가 감돌았다.
낡은 승합버스 한 대가 시동을 걸며 긴 하루를 시작했다.
창가 자리에 앉아 커피 한 모금 마시며 주변을 둘러보니, 현지 사람들로 가득한 버스 안엔 이미 작은 이야기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아저씨는 웃으며 물었다.
“첫 여행이야?”
“아뇨, 이번엔 북쪽으로 좀 걸어보려구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창밖을 바라봤다.
그 눈빛이 참 멀리도 간다 싶었다.

버스가 퀘존시티(Quezon City)를 벗어나 클락(Clark)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하자 창밖 풍경도 조금씩 바뀌었다.
회색 건물들 사이로 종종 나타나는 교회, 새벽시장 골목엔 아직도 손님을 기다리는 아낙들, 그리고 하늘은 오늘따라 유난히 푸르렀다.

도중에 멈춘 휴게소.
작은 식당에 들어가 시니강(Sinigang) 한 그릇과 마늘밥, 그리고 타호(Taho) 한 컵으로 간단한 아침을 해결했다.
시니강 국물 한 숟갈에 피로가 쓱 내려가는 기분.
뜨거운 두부와 달콤한 시럽이 입 안 가득 퍼지는 타호는 마치 “잘 왔어” 하고 인사라도 건네는 듯했다.

앙헬레스(Angeles)에 도착한 건 오전 9시쯤.
터미널 앞엔 여전히 탁탁거리는 트라이시클 소리.
햇살은 벌써 따갑고, 사람들은 분주했다.
하지만 내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드디어 첫 발을 뗀 거니까.

시작은 작았지만, 어쩌면 이 하루가 앞으로의 모든 여정을 바꿔줄지도 모른다.
앙헬레스의 거리 한 켠,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나는 오늘의 메모를 남겼다.

“5월 15일. 북부 루손주, 첫 걸음.”
“버스를 탔고, 시니강을 먹었고, 한 사람과 눈을 마주쳤다.”
“그래, 여행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