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부 루손주 걷는 시간》
3화. 앙헬레스, 붉은 거리에서 떠날 준비까지
앙헬레스에서 맞는 첫 아침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트라이시클 소리도, 거리의 분주함도
내 안에서는 이상하리만치 느리게 들렸다.
아마도 여행 초입의 그 설렘 때문이었을까.
나는 슬리퍼를 끌고 앙헬레스 공공시장으로 향했다.
그곳은 살아 있었다.
칼라만시 향이 코끝을 찌르고,
물고기 비늘이 해를 반사하는 그 복잡한 골목 사이에서
한 아주머니가 나에게 망고 세 개를 50페소에 팔았다.
“달아. 진짜야.”
그 말이 왠지 믿음직스러워서 바로 샀다.
그리고 그건 정말, 세상에서 가장 여행스러운 망고 맛이었다.
점심엔 길거리 시시그를 찾아 나섰다.
시장 옆 작은 포장마차, 철판 위에서 자글자글 소리 내는 고기.
칼라만시를 톡 뿌리고, 고추 하나 툭 썰어 넣으니
뜨거운 김과 함께 순간적으로 세상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맥주. 레드호스 한 병.
‘낮술은 언제나 반칙인데, 오늘은 봐주자.’
스스로 핑계를 대며 천천히 한 모금 마셨다.
목넘김이 강했지만, 왠지 따뜻했다.
여행자들의 마음을 위한 위로 같았다.
숙소는 마운틴뷰 게스트하우스.
하루 700페소.
작고 낡았지만, 침대는 부드러웠고
옥상에서 바라본 시내 풍경은 예상외로 멋졌다.
밤이면 불빛이 바다처럼 깔리고,
낮에는 먼 클락 공항의 비행기가 흐릿하게 보였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이들을 실은 비행기.
그 아래, 나는 아직 ‘출발선’ 위에 서 있었다.
그리고 밤.
현지 친구를 따라 간 곳은, 예전 이름 필즈 애비뉴(Fields Avenue).
하지만 지금은 다르게 불린다.
“Red Street.”
“외국인들이 기억하기 쉬워서 바꿨대.”
그 친구가 웃으며 말했는데, 정말 맞는 말이었다.
길거리 가득 붉은 네온사인,
각국 언어가 뒤섞여 터지는 바 소리,
그 안에서 나는 조용히 레드호스 한 병 더 시켰다.
이번엔 안주는 돼지껍데기.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같은 맥주를 마시며,
우리는 잠시 같은 밤을 공유했다.
앙헬레스의 마지막 날 아침,
나는 숙소 옆 작은 분식집에서 타호(Taho) 를 한 컵 샀다.
달콤하고 따뜻한 두부, 그 온기에 마음이 살짝 풀렸다.
짐을 싸는 손길은 느렸고,
창밖의 햇살은 여전히 따가웠지만,
내 안의 여정은 분명히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있었다.
“5월 17일. 앙헬레스를 떠난다.”
“길거리 시시그, 시장 망고, 레드 스트리트의 네온빛. 이 모든 걸 마음에 담고.”
“다음 도시로 가기 위해, 지금 다시 걸음을 꺼낸다.”

《북부 루손주 걷는 시간》
4화. 다우에서 딸락까지, 하루의 사이에 서서
다우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아직 해는 높이 떠 있었다.
마닐라보다 덜 시끄럽고, 앙헬레스보다 덜 붉은 거리.
여기서 나는 다시, 걷기 시작해야 했다.
딸락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지만,
낯선 도시로 가는 마음은 언제나 조금씩 멀어진다.
터미널 매표소 직원은 조용했고,
버스는 정시에 오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한 할아버지가 말했다.
“딸락 가는 길은 천천히 가는 게 좋아요.
논이랑 하늘이 싸우는 장면을 봐야 하거든.”
버스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창밖 풍경이 바뀌었다.
논. 그 너머에는 아지랑이.
논두렁을 걷는 농부, 세발자전거를 타고 학교 가는 아이들.
도시의 끝은 그렇게 느슨하게 풀려 있었고,
시골의 시작은 아주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중간 정류장에서 내린 사람들 사이로
옥수수를 파는 아주머니가 다가왔다.
“Matamis ‘to. 달아요.”
방금 삶은 옥수수, 뜨거운 껍질을 벗기며 나는 웃었다.
‘진짜 달구나.’
한 입 베어무는 순간, 앙헬레스의 붉은 밤이 완전히 멀어졌다.
딸락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기울고 있었다.
생각보다 더 조용한 거리, 낮은 건물들,
그리고 정류장 앞을 서성이던 개 한 마리.
숙소는 정해두지 않았다.
발길 닿는 대로 걸어보다가,
버스터미널 근처 작은 민박집 간판을 발견했다.
“무에르토 하우스.”
이름은 낯설었지만, 주인은 반가웠다.
“왜 딸락에 왔어요?”
“그냥... 다음 도시로 가는 길이에요.”
그 대답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도시, 작지만 정직해요. 내일이면 알게 될 거예요.”
숙소 옥상에서 본 노을은 맑았다.
바람이 조금 불었고, 도시의 경계가 희미했다.
나는 노트를 꺼내 짧게 적었다.
“5월 17일. 딸락에 도착.”
“논이 있는 풍경, 뜨거운 옥수수, 무심한 버스. 이 모든 게 오늘이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걷고 있다. 더 멀리, 더 깊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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